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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과 의사가 되기까지, 더 깊은 시간

fitmap1112 2025. 12. 13. 17:09

예린이의 하루 일기 같은 동화

피부과 의사가 되기까지, 더 깊은 시간

예린이의 일기장은 이제 한 권으로는 부족했다.
초등학교 때 쓰기 시작한 일기는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서랍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일기장들에는 성적표보다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계획표보다 더 정확한 성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늘 예린이는 대학병원 실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얀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며
문득 아주 오래전 초등학교 교실이 떠올랐다.
손을 들고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날,
보건실에서 친구의 무릎을 바라보던 그날 말이다.

그때의 예린이는 몰랐다.
그 하루들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을.

대학교에 들어오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 예린이는 처음으로 큰 좌절을 겪었다.
열심히 준비했던 시험에서 기대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받아 들고 집에 오는 길,
비 오는 버스 창가에 이마를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바로 일기장을 펼치지 못했다.
그날만큼은 글로 적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밤이 깊어가자 예린이는 결국 펜을 들었다.

‘오늘은 속상했다.
그래도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된 날이라
아마 중요한 날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눈물이 났다.
예린이는 그날 처음으로
잘해내는 것만이 성장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배웠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공부는 훨씬 더 치열해졌다.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이 하얘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예린이는 일부러 짧은 휴식을 가졌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느끼거나,
손을 씻으며 차가운 물의 감촉을 느꼈다.

피부가 외부 자극을 느끼듯,
마음도 쉼이 필요하다는 걸
예린이는 자기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 봉사활동으로 요양원을 찾았을 때였다.
할머니 한 분의 손을 잡아 드리는데
피부가 많이 건조하고 거칠었다.
예린이는 그 손을 놓지 못했다.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기보다
춥지는 않은지, 가렵지는 않은지 먼저 물었다.

그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의사는 병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함께 만지는 사람 같았다.’

그 문장은 훗날 예린이의 좌우명이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예린이는 공부보다 사람이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교와 경쟁은 늘 존재했다.
성적, 실습 평가, 교수님의 한마디에
하루 기분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예린이는 남과 자신을 쉽게 비교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대신 초등학교 때 쓴 첫 일기장을 다시 읽었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적힌
‘오늘 손을 들어서 기뻤다’라는 문장.
그 문장은 언제나 예린이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했다.

피부과를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갑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피부는 눈에 보이는 기관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예린이는 수없이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여드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청소년,
흉터 때문에 사람을 피하는 어른,
아토피로 잠 못 이루는 아이들.
예린이는 그 얼굴들을 떠올리며 공부했다.

실습 마지막 날, 지도 교수는 예린이에게 말했다.
“환자를 보는 눈이 참 차분하네요.”
그 말에 예린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차분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수많은 하루를 견뎌낸 결과라는 걸
예린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예린이는 집에 돌아와 다시 일기장을 펼친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환자 한 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완벽한 답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분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펜을 내려놓은 예린이는 창밖을 바라본다.
초등학교 등굣길에 보던 벚꽃처럼
계절은 또 바뀌어 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성공담이 아니다.
누군가보다 빨리 간 이야기라도 아니다.
다만 매일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자기 속도로 걸어온 한 사람의 기록이다.

이 동화의 마지막 교훈은 여전히 단순하다.
사람을 살피는 일은
아주 어릴 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오늘의 성실함은
반드시 미래에서 누군가의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예린이는 그렇게
오늘도 자신의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그 하루는
또 다음 날로 조용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