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린이의 다음 일기
시간이 쌓이는 방법을 배우는 하루
오늘의 아침은 조금 달랐다. 예린이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학교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오늘 뭐 하지?’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면, 요즘의 예린이는 ‘오늘은 이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점이 달라졌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예린이는 그 차이를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 가는 길, 예린이는 가방이 무겁다고 느끼지 않았다. 책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단단해진 덕분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교문을 지나며 만난 친구가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보여?” 예린이는 잠깐 웃으며 대답했다. “바쁜 건 아닌데, 그냥 할 게 많아.” 그 말은 숙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알고 싶은 것도, 생각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첫 수업은 사회였다. 오늘의 주제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이유’였다. 선생님은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혼자서 모든 걸 하지 않고, 직업을 나눌까요?” 교실 안은 조용해졌다. 예린이는 손을 들었다. “각자 잘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의사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농부도 있죠.” 그 순간 예린이는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딱 맞춰지는 느낌을 받았다. 잘하는 걸 오래 배우고, 그걸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 그게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예린이는 책상에 앉아 공책을 정리했다. 예전에는 그냥 적어 둔 메모들이었는데, 오늘은 항목별로 나누어 다시 써보았다. 중요한 것, 나중에 다시 보고 싶은 것, 아직 잘 모르겠는 것. 정리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공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예린이는 깨달았다. 머릿속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점심시간에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친구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모두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누군가 예린이에게 물었다. “넌 뭐 되고 싶어?” 예린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사람 몸을 공부하는 일.”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예린이는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해도 괜찮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과학 실험이 있었다. 피부의 온도 변화를 알아보는 간단한 실험이었다. 얼음팩을 손에 대고,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지는 감각을 적는 활동이었다. 처음엔 차갑고 아팠지만, 점점 둔해졌다가 다시 따뜻해졌다. 예린이는 그 변화를 유심히 기록했다. “느낌은 계속 변한다.” 그 문장을 적으면서 예린이는 감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아프고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는 것.
방과 후에는 학급 독서 모임이 있었다. 오늘 읽은 책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연구원, 약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예린이는 그 부분이 특히 좋았다. 한 사람이 모든 걸 해내는 게 아니라, 서로의 역할이 모여 한 사람을 살린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다. 책을 덮으면서 예린이는 생각했다. ‘공부도 혼자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많은 사람과 이어지는 거구나.’
집에 돌아온 예린이는 바로 숙제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 창가에 앉아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사회 시간의 질문, 과학 실험의 감각, 책 속 사람들. 하루가 그냥 지나간 게 아니라, 안에서 차곡차곡 쌓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숙제도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예린이는 부모님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공부가 힘들지는 않아?”라는 질문에 예린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힘들 때도 있어. 근데 안 하면 더 찝찝해.” 그 말에 부모님은 웃었다. 예린이는 힘들지 않다는 말보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예린이는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은 글이 길어졌다. “오늘 나는 시간을 그냥 보내지 않고 모은 것 같다. 바로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도 알았다.” 글을 쓰다 보니, 미래의 모습이 잠깐 스쳤다. 중학생이 되어 더 어려운 공부를 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선택의 갈림길에 서고, 대학교에서 사람의 몸을 깊이 배우는 모습. 그 끝에는 하얀 가운을 입고 누군가의 피부를 살피는 자신이 있었다.
예린이는 아직 그 모든 과정을 다 알지 못한다. 시험의 부담도, 실패의 무게도, 책임의 크기도 지금은 상상 속에만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처럼 하루를 성실히 살면, 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는 것. 그 쌓인 시간들이 예린이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 거라는 것.
오늘의 교훈은 거창하지 않았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곧 나를 만든다는 것. 빨리 가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예린이는 그 사실을 마음속에 조용히 적어 두었다.
불을 끄고 누운 예린이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직 멀었지만, 이미 시작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예린이의 길은 여전히 길고, 배울 것은 많다. 하지만 오늘의 일기는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예린이는 이미 자신의 방향을 알고 있으며, 그 방향으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가고 있다는 것을.
